유전자 편집 기술 CRISPR | 과학적 원리와 활용

이 글에서는 유전자 편집 기술 CRISPR | 과학적 원리와 활용에 대해 알아봅니다. 3세대 유전자 편집 기술로 불리는 CRISPR 유전자 가위의 핵심적인 과학적 원리를 알아보고, 의학 및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소개합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 CRISPR | 과학적 원리와 활용

CRISPR란 무엇인가?

CRISPR(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는 박테리아의 면역 체계에서 유래한 유전자 편집 기술입니다. 특정 DNA 염기서열을 찾아내어 정교하게 잘라내고 수정할 수 있어 ‘유전자 가위’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기존 유전자 편집 기술에 비해 정확성, 효율성, 그리고 비용 측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생명과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습니다.

작동 원리: 유전자 가위의 비밀

CRISPR 기술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되어 작동합니다. 이는 마치 주소를 찾아가 잘라내는 정교한 가위와 같습니다.

  • 주요 구성 요소

    • Cas9(크리스퍼 연관 단백질 9): DNA를 실제로 잘라내는 역할을 하는 효소 단백질입니다. ‘가위’의 날에 해당합니다.
    • 가이드 RNA (gRNA, Guide RNA): Cas9 단백질을 목표 DNA 서열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편집하고자 하는 DNA 염기서열의 상보적인 서열 정보를 가지고 있어 ‘내비게이션’ 역할을 수행합니다.
  • 작동 과정

    1. 표적 인식: 연구자가 편집을 원하는 특정 DNA 위치에 맞는 gRNA를 제작하여 Cas9 단백질과 결합시킵니다.
    2. DNA 절단: gRNA가 표적 DNA 서열을 발견하고 결합하면, Cas9 단백질이 활성화되어 해당 위치의 DNA 이중 나선을 정교하게 절단합니다.
    3. 세포의 복구 메커니즘 활용: DNA가 잘리면 세포는 스스로 이를 복구하려는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CRISPR 기술은 이 복구 과정을 활용합니다.
      • 비상동성 말단 연결 (NHEJ): 절단된 부위를 단순히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염기 서열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추가되는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유전자 녹아웃(Knock-out)’에 주로 사용됩니다.
      • 상동 유도 복구 (HDR): 정상적인 DNA를 주형(template)으로 사용하여 손상된 부위를 정확하게 복구하는 방식입니다. 연구자가 원하는 정상 DNA 조각을 세포 내에 함께 넣어주면, 세포는 이를 주형으로 삼아 손상된 유전자를 원하는 서열로 교정하거나 새로운 유전자를 삽입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 CRISPR의 활용 분야

CRISPR 기술은 이론적으로 거의 모든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수정할 수 있어 의학, 농업, 기초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 의학 분야: 유전 질환 치료의 새로운 희망

    • 단일 유전자 질환 치료: 특정 유전자 하나에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질병 치료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 예시: 겸상 적혈구 빈혈증
        헤모글로빈 유전자의 단일 염기 변이를 CRISPR로 교정하여 정상적인 적혈구를 생성하도록 유도하는 임상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 암 치료: 환자의 면역세포(T세포)를 꺼내 암세포를 더 잘 공격하도록 유전자를 편집한 뒤 다시 주입하는 CAR-T 치료법의 효율과 안정성을 높이는 데 사용됩니다.
    • 감염성 질환 연구: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침입할 때 사용하는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인체 DNA에 숨어있는 바이러스(예: HIV)를 직접 잘라내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농업 및 축산업: 맞춤형 품종 개발

    • 내병성 및 생산성 향상: 특정 질병이나 해충, 가뭄 등 환경 스트레스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 예시: 흰가루병 저항성 토마토
        흰가루병에 취약하게 만드는 유전자를 제거하여 병에 걸리지 않는 토마토를 개발했습니다.
    • 영양 성분 강화: 인체에 유익한 특정 성분이 더 많이 생성되도록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 예시: 가바(GABA) 성분이 강화된 토마토
        혈압 강하 효과가 있는 가바 성분 함량을 높인 토마토가 일본에서 상용화되었습니다.
    • 가축 개량: 질병에 강하고 성장이 빠른 가축을 개발하거나, 인간에게 유용한 단백질을 우유 등으로 생산하는 형질전환 동물을 만드는 데 활용됩니다.
  • 기초 과학 연구: 생명 현상 규명의 핵심 도구

    • 유전자 기능 연구: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없애거나(Knock-out), 발현을 조절하여 해당 유전자가 생명 현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 질병 모델 개발: 인간의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를 실험동물(예: 쥐)에 도입하여, 질병의 발병 원리를 연구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사용합니다.

넘어야 할 산: 기술적 과제와 윤리적 논의

CRISPR는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상용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기술적, 윤리적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 기술적 한계점

    • 표적 이탈 효과 (Off-target effect): gRNA가 목표했던 DNA 서열이 아닌, 유사한 다른 서열에 결합하여 의도치 않은 유전자를 편집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전달 문제 (Delivery issue): Cas9 단백질과 gRNA를 체내의 원하는 세포나 조직에 정확하고 안전하게 전달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기술적 난관입니다.
  • 윤리적 문제

    • 생식세포 편집: 정자, 난자 등 생식세포의 유전자를 편집하면 변경된 유전 정보가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유전자 풀 자체를 바꿀 수 있어 신중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 맞춤형 아기 (Designer baby) 논란: 질병 치료 목적을 넘어, 지능이나 외모 등 비치료적 형질을 개선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윤리적 우려가 제기됩니다.
    • 사회적 불평등: 고비용의 유전자 치료 기술이 부유층에게만 제공될 경우, 유전적 차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CRISPR 기술의 발전 | 정밀성과 안전성 향상

기존 CRISPR-Cas9 기술의 한계점으로 지적되는 표적 이탈 효과와 교정 효율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계는 더욱 정교하고 안전한 차세대 유전자 편집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무딘 과도를 정밀한 수술용 메스로 발전시키는 과정과 같습니다.

염기 교정 (Base Editing): 가위를 넘어선 지우개와 연필

염기 교정은 DNA 이중 나선을 완전히 절단하지 않고, 목표 위치의 DNA 염기 하나(A, T, C, G)를 다른 염기로 바꾸는 기술입니다.

  • 작동 방식: DNA를 자르는 기능이 비활성화된 Cas9 단백질(dCas9)과 특정 염기를 화학적으로 변환시키는 효소(탈아미노효소)를 결합하여 만듭니다. dCas9이 목표 지점을 찾아 붙잡고 있으면, 결합된 효소가 마치 연필에 달린 지우개처럼 특정 염기 하나를 수정합니다.
  • 장점: DNA를 자르지 않기 때문에, 절단 후 발생하는 비상동성 말단 연결(NHEJ)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삽입이나 삭제 돌연변이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줄여 안전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 활용 예시: 어린 나이에 급격한 노화를 겪는 질병인 ‘조로증(Progeria)’의 경우, 단 하나의 염기(C)가 다른 염기(T)로 바뀐 것이 원인입니다. 연구팀은 염기 교정 기술을 이용해 동물 모델에서 이 잘못된 염기를 성공적으로 교정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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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 교정 (Prime Editing): 원하는 서열의 검색 후 붙여넣기

프라임 교정은 염기 교정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단일 염기 교체는 물론 작은 DNA 서열의 삽입과 삭제까지 가능한 매우 정밀한 기술입니다.

  • 작동 방식: Cas9 단백질 변이체와 역전사 효소(RNA 정보를 바탕으로 DNA를 합성하는 효소)를 융합하여 사용합니다. 특히 가이드 RNA(pegRNA)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 RNA는 목표 DNA를 찾아갈 주소 정보와 함께, 새로 바꿀 유전 정보(주형)까지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워드프로세서의 ‘찾아 바꾸기(Find and Replace)’ 기능처럼 작동합니다.
  • 장점: 대부분의 유전 질환을 유발하는 다양한 형태의 돌연변이를 교정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집니다. 이는 별도의 주형 DNA를 넣어줄 필요가 없어 효율이 높고, 이론적으로 알려진 인간 유전 질환의 약 89%를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활용 예시: 낭성 섬유증, 겸상 적혈구 빈혈증, 테이-삭스 병 등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삭제나 삽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유전 질환을 세포 수준에서 성공적으로 교정하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습니다.

CRISPR 진단 기술 | 질병의 신속하고 정확한 감지

CRISPR는 유전자 ‘편집’뿐만 아니라 질병 ‘진단’ 분야에서도 혁신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특정 유전자 서열을 찾아내는 CRISPR의 능력을 활용하여 바이러스나 암세포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검출합니다.

  • 핵심 기술: SHERLOCK(Cas13 사용)과 DETECTR(Cas12 사용)과 같은 기술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Cas 단백질은 목표 DNA나 RNA 서열을 발견하면, 주변에 있던 다른 염기서열까지 무차별적으로 자르는 ‘부수적 절단(collateral cleavage)’ 활성을 보입니다.
  • 진단 원리: 검사 시료에 CRISPR 시스템과 함께, 평소에는 뭉쳐 있다가 잘리면 신호(예: 형광)를 내는 보고 분자(reporter molecule)를 함께 넣어줍니다. 만약 시료에 목표하는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있다면 Cas 단백질이 활성화되어 주변의 보고 분자를 자르게 되고, 그 결과 발생하는 신호를 통해 감염 여부를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 활용 예시: 코로나19(COVID-19) 팬데믹 상황에서 바이러스의 RNA를 신속하게 검출하는 진단 키트 개발에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PCR 검사만큼 정확하면서도 현장에서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신속성과 편의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CRISPR 전달 기술 | 치료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

CRISPR 기술이 실험실의 성공을 넘어 실제 치료제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유전자 가위’를 환자의 체내 목표 세포까지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전달(Delivery) 기술이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가위라도 필요한 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다양한 전달 기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성 전달체 (Viral Vectors)

  • 원리: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해한 유전자를 제거한 바이러스를 택배 차량처럼 이용하여 CRISPR 구성 요소(Cas 단백질과 gRNA를 만드는 유전자)를 세포 내로 주입하는 방식입니다. 아데노 부속 바이러스(AAV)가 가장 널리 사용됩니다.
  • 장점: 오랜 연구를 통해 검증된 방식으로, 세포 내 침투 효율이 매우 높아 치료 효과가 뛰어납니다.
  • 한계점: 인체 면역 체계가 바이러스를 외부 침입자로 인식하여 면역 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며, 한 번 사용하면 체내에 항체가 생겨 반복 투여가 어렵습니다. 또한 실을 수 있는 유전자의 크기에 제한이 있습니다.

비바이러스성 전달체 (Non-viral Vectors)

  • 원리: 바이러스가 아닌 인공적인 나노입자를 운반체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체내에서 쉽게 분해되는 지질 성분으로 만든 지질 나노입자(LNP, Lipid Nanoparticle)가 대표적이며, 코로나19 mRNA 백신 기술에 활용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 장점: 바이러스와 달리 면역 반응을 일으킬 위험이 적고, 대량 생산이 용이합니다. 또한 더 큰 유전자를 실을 수 있어 활용도가 높습니다.
  • 한계점: 바이러스 벡터에 비해 아직 세포 내 전달 효율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특정 장기가 아닌 다른 조직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을 통제하는 것이 기술적 과제입니다.

후성유전체 편집 | DNA 서열을 바꾸지 않는 조절

CRISPR 기술은 DNA 염기 서열 자체를 영구적으로 바꾸는 것을 넘어, 유전자의 작동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후성유전체(Epigenome) 편집’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책의 내용을 바꾸지 않고, 특정 페이지에 즐겨찾기 표시를 하거나 검게 칠해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작동 원리: DNA를 자르지 않는 가위

  • 핵심 기술: DNA를 자르는 기능은 없앴지만 특정 서열을 찾아가 달라붙는 능력은 유지한 변형 Cas9 단백질(dCas9, dead Cas9)을 사용합니다.
  • 조절 방식: 이 dCas9 단백질에 유전자 발현을 활성화하는 단백질(Activator)이나 억제하는 단백질(Repressor)을 결합시킵니다.
    • CRISPR 활성화(CRISPRa): dCas9-활성인자 복합체가 목표 유전자 근처에 붙어 해당 유전자가 더 많이 발현되도록 유도합니다.
    • CRISPR 억제(CRISPRi): dCas9-억제인자 복합체가 반대로 목표 유전자의 발현을 차단하거나 줄입니다.

후성유전체 편집의 잠재력

  • 가역적 조절: DNA 서열 자체를 바꾸는 영구적인 편집과 달리, 필요에 따라 유전자를 켰다가 다시 끌 수 있는 가역적(Reversible) 조절이 가능합니다. 이는 질병 치료에 있어 안전성을 높이는 중요한 장점입니다.
  • 활용 분야: 특정 유전자의 과발현이나 저발현이 원인이 되는 암, 대사 질환, 신경 질환 등의 연구와 치료법 개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암을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의 발현 스위치를 안전하게 끌 수 있습니다.

CRISPR의 미래 전망 | 사회적 책임과 과제

CRISPR 기술은 생명 과학의 경계를 허물며 인류에게 전례 없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지만, 동시에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커다란 사회적, 윤리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기술의 융합 S고도화

  • 인공지능(AI)과의 결합: 방대한 유전체 데이터 분석에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표적 이탈 효과를 최소화하는 정교한 가이드 RNA(gRNA)를 설계하고, 편집 결과를 예측하여 기술의 정확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 줄기세포 기술과의 융합: 유도만능줄기세포(iPSC)의 유전자를 교정한 후, 이를 원하는 장기나 조직 세포로 분화시켜 이식하는 방식의 세포 치료제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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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드라이브와 생태계 문제

  • 개념: CRISPR를 이용하여 특정 유전자가 자연적인 유전 법칙을 거슬러 다음 세대에 반드시 전달되도록 만드는 기술입니다.
  • 긍정적 측면: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나 라임병을 퍼뜨리는 진드기와 같이 질병을 매개하는 개체군을 불임으로 만들거나, 특정 유해 외래종을 박멸하여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 잠재적 위험: 한번 자연으로 방출되면 되돌리기 어려우며, 의도치 않게 생태계의 먹이 사슬을 붕괴시키거나 예상치 못한 돌연변이를 일으켜 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교란을 초래할 수 있어 엄격한 규제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사회적 합의와 규제

CRISPR 기술의 발전 속도를 사회적, 법적, 윤리적 논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의 혜택을 인류 전체가 공평하게 누리면서도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과학계, 정부, 산업계, 그리고 시민 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투명한 논의를 통해 합리적인 규제와 가이드라인을 수립해나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류의 미래를 바꿀 이 강력한 도구를 어떻게 현명하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CRISPR 치료제 상용화 | 현실이 된 유전자 의학

실험실 속 기술이었던 CRISPR는 이제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의약품으로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유전 질환으로 고통받던 환자들에게 완치의 희망을 제시하는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최초의 CRISPR 치료제: 카스게비(Casgevy)

2023년 말 영국과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CRISPR 기반 유전자 치료제인 ‘카스게비(상표명)’가 공식 승인되었습니다.

  • 치료 대상 질환: 겸상 적혈구 빈혈증과 베타 지중해 빈혈증. 두 질환 모두 헤모글로빈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에 결함이 생겨 적혈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심각한 유전 질환입니다.
  • 작동 원리 (Ex-vivo, 체외 편집 방식):
    1. 줄기세포 추출: 환자의 몸에서 혈액을 만드는 조혈모세포(줄기세포)를 채취합니다.
    2. 유전자 편집: 체외에서 CRISPR-Cas9 기술을 이용해 이 줄기세포의 특정 유전자(BCL11A)의 기능을 차단합니다. BCL11A는 성인이 된 후 태아기 헤모글로빈 생성을 억제하는 스위치 역할을 합니다.
    3. 기능 회복: 이 스위치를 꺼주면, 결함이 있는 성인 헤모글로빈 대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태아기 헤모글로빈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4. 세포 주입: 편집이 완료된 줄기세포를 환자에게 다시 주입하면, 이 세포들이 골수에서 건강한 적혈구를 만들어내면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됩니다.

상용화의 의미와 과제

  • 희망의 증거: CRISPR 기술이 단순히 유전자를 바꾸는 도구를 넘어, 실제로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음을 증명했습니다.
  • 높은 치료 비용: 1인당 치료 비용이 수십억 원에 달해, 기술의 혜택이 소수의 환자에게만 돌아갈 수 있다는 접근성 문제가 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 복잡한 치료 과정: 환자는 자신의 줄기세포를 주입받기 전, 기존의 골수를 제거하기 위한 고강도 항암 화학 요법을 거쳐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주사 치료가 아닌, 장기간의 입원과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한 복잡하고 힘든 과정입니다.

Cas 단백질의 확장 | CRISPR 시스템의 다양성

CRISPR 유전자 편집 시스템의 핵심인 Cas 단백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Cas9 외에도 자연계에 수많은 종류가 존재합니다. 과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가진 새로운 Cas 단백질을 발굴하고 개량하여 유전자 편집 도구 상자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Cas9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전자 가위

  • Cas12a (舊 Cpf1): Cas9과 더불어 널리 연구되는 단백질로, 여러 독특한 장점을 가집니다.
    • 엇갈린 절단 (Staggered cut): Cas9은 DNA 이중 나선을 평평하게 자르는 ‘뭉툭한 끝(blunt end)’을 만들지만, Cas12a는 한쪽 가닥이 더 길게 남는 ‘끈끈한 끝(sticky end)’을 만듭니다. 이는 새로운 DNA 조각을 삽입하는 상동 유도 복구(HDR)의 효율을 높이는 데 유리할 수 있습니다.
    • 다른 인식 서열 (PAM): Cas9과 다른 염기서열을 인식하기 때문에, Cas9으로는 편집할 수 없었던 새로운 DNA 영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유전자 편집의 범위를 넓혀줍니다.
  • Cas13: DNA가 아닌 RNA를 표적하여 절단하는 매우 특별한 Cas 단백질입니다.
    • 가역적 조절: DNA를 영구적으로 바꾸는 대신, 유전 정보의 전달 과정에 있는 RNA를 일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합니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동안에만 작용하고, 원할 때 중단할 수 있어 안정성이 높습니다. 앞서 언급한 CRISPR 진단 기술 ‘SHERLOCK’의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 초소형 Cas 단백질 (Miniature Cas): 크기가 매우 작아 전달체에 쉽게 실을 수 있는 Cas 단백질입니다.
    • 전달의 용이성: 기존 Cas9은 크기가 커서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AAV 바이러스 벡터에 담기 어려웠습니다. 박테리오파지 등에서 발견된 초소형 Cas 단백질들은 AAV 벡터에 쉽게 탑재될 수 있어 체내 전달(in-vivo) 치료제 개발의 한계를 극복할 열쇠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CRISPR 안전성 제어 | 안티-크리스퍼 단백질

유전자 가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또는 ‘오프 스위치(Off-switch)’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안티-크리스퍼(Anti-CRISPR, Acr)’ 단백질입니다.

자연에서 발견된 CRISPR 억제제

  • 기원: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는 박테리아의 CRISPR 면역 시스템을 회피하기 위해 진화 과정에서 CRISPR-Cas 시스템의 기능을 무력화하는 다양한 단백질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티-크리스퍼 단백질입니다.
  • 작동 방식: 안티-크리스퍼 단백질은 다양한 방식으로 유전자 가위의 활동을 억제합니다. 가이드 RNA가 목표 DNA에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Cas 단백질에 직접 달라붙어 DNA를 자르는 효소 활성을 차단합니다.

‘안전 스위치’로서의 활용 가능성

안티-크리스퍼 단백질은 CRISPR 기술의 안전성과 정밀성을 한 차원 높여줄 핵심 도구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 표적 이탈 효과 감소: 목표한 유전자 편집이 끝난 후 안티-크리스퍼를 투여하여 가위의 활동을 즉시 중단시킴으로써, 의도치 않은 다른 DNA를 손상시키는 부작용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 조직 특이적 편집: 특정 장기(예: 간)에만 유전자 편집이 일어나도록 조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CRISPR 시스템을 전신에 전달한 후, 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조직에 안티-크리스퍼를 전달하여 원하는 곳에서만 가위가 작동하도록 제어하는 방식입니다.
  • 예상치 못한 부작용 발생 시 대처: CRISPR 치료 중 환자에게서 예측하지 못한 면역 반응이나 부작용이 나타날 경우, 안티-크리스퍼를 ‘해독제’처럼 투여하여 유전자 가위의 활동을 즉시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CRISPR 치료 방식 | 체내 편집과 체외 편집

CRISPR 기술을 활용한 치료 전략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뉩니다. 이는 환자의 세포를 밖으로 꺼내 실험실에서 수리한 뒤 다시 넣어주는 방식과, 치료제를 체내에 직접 투여하여 몸 안에서 세포를 고치는 방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체외 유전자 편집 (Ex vivo gene editing)

환자의 몸에서 특정 세포를 채취한 뒤, 외부 실험실 환경에서 유전자를 편집하고 다시 환자에게 주입하는 방식입니다.

  • 작동 과정: 주로 혈액을 만드는 조혈모세포나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T세포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 세포들을 꺼내 CRISPR 시스템으로 원하는 유전자를 교정한 후, 해당 세포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편집되었는지 검증 과정을 거칩니다. 이후 안전성이 확인된 세포만을 다시 환자에게 이식합니다.
  • 장점:
    • 정밀 제어: 실험실 환경에서 편집 과정을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 안전성 검증: 의도치 않은 표적 이탈 효과 등이 발생했는지 사전에 확인하여 위험한 세포를 걸러낼 수 있어 안전성이 비교적 높습니다.
  • 한계점:
    • 적용 대상 제한: 혈액 세포처럼 몸 밖으로 쉽게 꺼내고 다시 주입할 수 있는 일부 세포에만 적용이 가능합니다.
    • 복잡성과 비용: 세포를 추출하고, 편집하고, 배양한 뒤 다시 주입하는 전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앞서 언급된 최초의 CRISPR 치료제 ‘카스게비’가 대표적인 체외 편집 방식 사례입니다.

체내 유전자 편집 (In vivo gene editing)

CRISPR 유전자 가위를 바이러스 벡터나 지질 나노입자(LNP)와 같은 전달체에 실어 직접 환자의 몸 안으로 주입하는 방식입니다.

  • 작동 과정: 주사 등의 방법으로 투여된 CRISPR 치료제가 혈관을 통해 이동하여 간, 눈, 뇌 등 목표하는 장기나 조직의 세포 안으로 들어가 직접 유전자를 편집합니다.
  • 장점:
    • 넓은 적용 범위: 체외로 꺼내기 어려운 고형 장기나 신체 조직에 직접 접근하여 치료할 수 있습니다.
    • 편의성: 잠재적으로 한 번의 주사 투여로 치료가 완료될 수 있어 환자의 편의성이 높습니다.
  • 한계점:
    • 전달의 어려움: CRISPR 시스템을 목표 조직 세포에만 정확하게 전달하고 다른 곳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술적 난관입니다.
    • 안전성 우려: 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면역 반응이나 표적 이탈 효과 등을 실시간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현재 유전성 안과 질환이나 간 질환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CRISPR의 산업적 활용 | 친환경 바이오 공학

CRISPR는 의학과 농업을 넘어, 미생물을 이용해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산업 생명 공학 분야에서도 핵심적인 도구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이오 연료 및 화학물질 생산

미생물을 유전적으로 개량하여 효율적인 ‘세포 공장(Cell factory)’으로 만드는 데 CRISPR가 활용됩니다.

  • 원리: 효모나 대장균과 같은 미생물의 유전체에서 불필요한 대사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제거하고, 원하는 물질(예: 바이오 연료, 의약품 원료, 플라스틱 원료)을 대량 생산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를 강화하거나 새로 삽입합니다.
  • 예시: 식물성 바이오매스를 분해하여 바이오 에탄올을 생산하는 효모의 효율을 높이거나, 미세조류(microalgae)가 더 많은 지질(lipid)을 생산하도록 유전자를 편집하여 바이오디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경 정화 및 생태계 보전

CRISPR 기술은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의 능력을 강화하거나, 기후 변화에 대응하여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시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 난분해성 물질 분해: 자연에 존재하는 미생물에 CRISPR를 적용하여 플라스틱이나 독성 화학물질을 분해하는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정 오염 물질만 감지하고 분해하도록 유전자 회로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 기후 변화 대응 생물 개발: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 온도 상승으로 백화 현상을 겪는 산호의 유전자를 편집하여 열 저항성을 높이거나, 메탄가스 배출이 적은 방향으로 벼의 유전자를 개량하는 등 지구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잠재력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CRISPR 특허 전쟁 | 세기의 기술 경쟁

CRISPR 기술의 막대한 잠재력과 상업적 가치는 이 기술의 원천 특허를 누가 소유할 것인지를 두고 역사상 가장 치열한 과학계 특허 분쟁을 촉발했습니다.

핵심 당사자들과 논쟁의 시작

  • UC 버클리 진영: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Emmanuelle Charpentier)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2012년, CRISPR-Cas9 시스템을 시험관 내에서 특정 DNA를 자르도록 재설계할 수 있음을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최초로 보고했습니다.
  • 브로드 연구소 진영: MIT와 하버드 소속의 펭 장(Feng Zhang)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약 7개월 뒤, 이 기술을 인간 및 동물의 세포와 같은 진핵세포(eukaryotic cells)에 성공적으로 적용했음을 ‘사이언스’에 발표했습니다.

논쟁의 핵심 이슈

분쟁의 핵심은 ‘과연 진핵세포에서의 성공이 기존 기술로부터 쉽게 예측 가능한 당연한 응용이었는가, 아니면 독창적인 발명이었는가?’였습니다.

  • UC 버클리 측은 자신들의 최초 발견이 기술의 근간이며 진핵세포 적용은 예측 가능한 후속 단계라고 주장했습니다.
  • 브로드 연구소 측은 복잡한 구조의 진핵세포에서 CRISPR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최적화한 것은 상당한 창의성과 노력이 필요한 별개의 발명이라고 맞섰습니다.

영향과 현재

길고 복잡한 법적 분쟁 끝에, 법원은 양측의 발견 모두 독자적인 특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CRISPR 기술 관련 특허가 여러 기관에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의 CRISPR 기반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기업은 여러 기관으로부터 라이선스를 확보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기술 개발의 비용과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특허 분쟁을 피하기 위해 Cas9이 아닌 Cas12, Cas13 등 새로운 CRISPR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전자 편집 기술 CRISPR | 과학적 원리와 활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 CRISPR | 과학적 원리와 활용